검색

문화역사 탐방 -조선왕조 스캔들에 포로가 된 선조의 두왕자 수난기

가 -가 +

문화부
기사입력 2019-11-27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6)] 포로가 된 선조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
 
 

▎임진왜란 당시 13척의 배로 적선 133척을 격퇴시킨 명량대첩을 기념하는 재현행사의 한 장면. / 사진·중앙포토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6)] 포로가 된 선조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



 

임진왜란 초기 파천 결정 후 근왕병 모집하는 과정에서 ‘관심 밖’의 두 아들 골라…



악조건 속에서 선전했으나 왜군에 포로로 잡힌 뒤 1년 동안 볼모 신세 면치 못해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임진왜란 중 왜군의 남해안 지역 점유가 몇 년간이나 지속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조선의 국력이 약한 데다 선조의 무책임이 더해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따른다. 서울 용산구 소재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임진왜란 전시물. 조선 해군이 왜군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임진왜란 직후, 선조나 한양 사람들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명장으로 소문난 신립 장군과 이일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상황이 급변했다. 1592년(선조 25) 4월 21일에 선조가 받은 이일 장군의 보고서에 “오늘날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서 감당해낼 자가 없으니 신은 오직 죽을 따름입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선조는 은밀히 미투리 등 피란 물품을 준비했다. 또한 언제라도 쓸 수 있게 말을 대령하게 했다. 혹시 필요할 경우 파천(播遷)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이와 함께 궁궐 밖에 살던 자녀와 사위, 며느리들을 불러들였다.

선조의 자녀들이 입궁하면서 파천 소문이 퍼져나갔다. 설상가상 상주 전투에서 이일 장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27일 한양에 알려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도성 밖으로 나가는 피란 행렬이 줄을 이었다. 반면에 병력 자원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 역시 은밀하게 파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파천 소문을 막지는 못했다. 조정 신료와 종친들은 파천 소문에 분개하며 결사 항전을 부르짖었다. 결국 선조는 “종묘와 사직이 이곳에 있는데 내가 장차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며 파천하지 않겠다고 공언해야 했다.

그러나 파천 소문 자체가 인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대신들은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자를 세울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28일에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됐다. 이 조치로 인심이 조금 안정되는 듯했지만 충주 전투에서 신립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29일 저녁에 전해지면서 한양은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날 한밤중에 파천이 결정되면서 선조는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째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모셔와 파천 행렬에 동참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왕자들을 파견해 근왕병을 모집하는 것이었는데 모두 파천 반대론을 누르기 위한 조치였다.

이혼과 힘 합쳐 육군 최초의 승리에 기여한 임해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했던 왜군 장수들의 황금가면. / 사진·중앙포토
당시 선조의 아들 7명 중에서 2명은 미성년이었다. 따라서 세자 광해군을 제외한다면 4명의 왕자들을 모두 파견해 근왕병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임해군과 순화군 두 명만 각각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게 했다. 반면 세자 광해군은 물론 이미 성년이 된 신성군과 정원군도 자신을 수행하게 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임해군은 선조의 큰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심을 많이 잃어 친동생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이런 상황에서 두 형제를 함께 데리고 파천한다면 그들 사이에 알력이 커질 것은 명약관화했다. 그래서 두 형제를 떼어 임해군에게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면 선조에게는 일석이조였다. 첫째는 두 형제의 알력을 최소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형제 간의 경쟁심을 이용해 근왕병 모집을 최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의 경우 임해군의 근왕병 모집 실적이 아주 탁월하다면 세자를 바꿀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선조와 떨어져 근왕병을 모집하게 된 임해군은 21세로 명실상부한 성년이었음에 비해 순화군은 13세에 불과한 나이였다. 반면 선조를 수행하게 된 신성군은 15세였고 정원군은 13세였다. 세자 광해군은 18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세의 순화군이 15세의 신성군을 제치고 근왕병 모집에 나서게 된 이유는 선조의 편애 때문이었다.

선조는 후궁 중에서 숙의 김씨를 가장 총애했다. 당연히 아들들 중에서는 숙의 김씨 소생인 신성군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실 선조가 임진왜란 때까지 세자 책봉을 미룬 가장 큰 이유는 신성군 때문이었다. 이전부터 선조는 신성군을 세자로 삼고 싶어 했지만, 왕비의 아들도 아니고 후궁 소생 중 첫째도 아니어서 그렇게 못했다. 선조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신성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 임진왜란이 터지는 바람에 부득이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던 것이다.

선조는 신성군으로 하여금 자신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만약의 경우에 세자 광해군을 대신하게 할 생각이었다. 신성군의 친동생인 정원군 역시 숙의 김씨 소생이었기에 선조를 수행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근왕병을 모집하게 된 임해군이나 순화군은 상대적으로 선조의 관심 밖에 있던 왕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와 강원도에 왕자를 파견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파천 길에 오른 선조의 1차 목적지는 개성 아니면 평양이었다. 당연히 선조가 파천하게 될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왕자들이 앞장서 근왕병을 모집할 필요는 없었다. 반면 함경도와 강원도는 태조 이성계가 태어나 활약하던 곳으로 조선 왕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최정예 병력으로 손꼽히는 6진의 기마대가 소재한 곳이기도 했다.

4월 30일 새벽, 임해군은 창덕궁을 떠나 함경도로 향했다. 조금 앞서서 순화군도 강원도로 갔다. 5월 1일 경기 포천에 도착한 임해군은 그곳에서 우연히 순화군을 만났는데 다시 길을 나눠 북으로 향했다.

5월 3일 강원도 금화에 도착한 임해군은 그곳에서 왜적이 이미 춘천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금화와 춘천은 하루 일정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임해군은 즉시 북으로 길을 재촉해 5일에는 철령을 넘어 함경도의 안변에 도착했고, 이어 9일에는 원산 주변에 있는 덕원에 도착했다.

임해군은 그곳으로 함경도 감사와 군사령관들을 소집했다. 이에 호응해 북청에 주둔하던 남병사 이혼이 4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이끌고 왔다. 이 병력이 당시 조선 관군 중에서는 최정예 병력이었다. 임해군은 그중에서 200명을 선발해 선조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전쟁터로 가게 했다.

남병사 이혼은 관군과 힘을 합쳐 경기 양주 해유령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였다. 70여 명의 왜적을 참수한 이 전투는 임진왜란 이후 육군이 얻은 최초의 승리였다. 이외에도 임해군은 함경도 주민들의 항전 의지를 고양시키기 위해 말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세금을 대폭 감면했다. 임해군의 근왕병 모집 활동은 비록 몇몇 부작용 예컨대 강제적 물자 수탈이나 불법적 노동력 징발 등을 야기하긴 했지만 현실적인 성과도 내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7일에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평양의 선조는 물론 덕원의 임해군 역시 위험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할 각오를 하고 의주로 갔고, 임해군은 마천령을 넘어 함경북도의 경성으로 퇴각했다. 그 당시 순화군은 임해군과 함께 있었다.

함경도인들, 두 왕자를 잡아 왜장에게 내주다

임진강을 건넌 왜적은 황해도 평산에 이르러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로 각각 길을 나눠 침략했다. 함경도로 쳐들어간 왜장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였다. 황해도 곡산을 경유한 가토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함경도로 쳐들어갔다. 당시 남병사 이혼은 왜적의 침입로를 철령으로 예상하고 강원도 회양에 주둔했다. 하지만 그곳은 황해도 곡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가토는 무인지경을 달리듯 함경도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6월 17일, 가토는 안변에 도착했다. 가토는 병력을 나눠 일부는 안변에서 흡곡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게 했다. 반면 자신은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함흥으로 진출한 뒤 북청, 단천을 지나 계속 북진하면서 왕자들을 추격했다.

북병사 한극함은 마천령에서 가토를 막으려 했으나 대패했다. 그 전투가 7월 18~19일 이틀간 전개된 함경북도 성진의 해정창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함경도의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은 일거에 와해됐다. 이런 상황에서 임해군과 순화군은 또다시 경성에서 회령으로 퇴각했다가 7월 23일에 회령 사람 국경인에게 포로로 잡혔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왕자들이 포로로 잡히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왜장 가등청정이 함경도로 침입하니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재신을 잡아 적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함경남도와 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됐다. 당초 가등청정이 고개를 넘어 왕자 일행을 끝까지 추격하니 왕자가 경성으로 도망했다. 북병사 한극함이 마천령에서 항거해 싸웠으나 해정창이 왜군에 차단당하자 군사들이 패해 도망했다. 왕자가 진로를 바꿔 회령부로 들어갔는데 적병이 가까이 추격했다는 말을 듣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회령의 토병(土兵)이 이미 모반해 거짓으로 성을 지키겠다고 청하면서 스스로 문의 자물쇠를 간수하여 나가지 못하게 했다. 국경인이 마침내 객사를 포위하고 두 왕자 및 부인·여종·노비 등과 재상 김귀영, 황정욱, 황혁과 그들의 가솔을 잡아 모두 결박하고 마치 기물을 쌓아놓듯 한 칸 방에 가뒀다.”[<선조수정실록> 25년(1592년 7월 1일)]

이에 앞선 6월 11일, 선조가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하자 함경도에는 국왕이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에 망명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여기에 해정창 전투의 패배 소식이 더해지고 또 임해군과 순화군의 회령 도피 소식이 더해지자 함경도 사람들은 왕자들 역시 명나라에 망명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명과 왜의 ‘협상 제물’이 된 왕자들


▎임진나루 인근 전망대에서 바라본 임진강의 전경.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이곳을 거쳐 피란을 갔다. / 사진·중앙포토
실록에 의하면 회령에 들어간 임해군과 순화군은 왜적이 가까이 추적했다는 말을 듣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 행동이 의심을 불러왔다. 회령에서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는 것은 사실상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들어가려 했다는 것인데 결국 망명하려 했다는 뜻이었다.

사실 해정창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임해군과 순화군이 회령을 향해 갈 때부터 망명할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함경도 사람들은 왕자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꼈고, 그랬기에 왕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 사실을 일일이 써 붙여 가토에게 알렸다. 이런 사실에서 보면 해정창에서 패배한 이후 선조는 물론 임해군과 순화군도 함경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은 국경인은 이 사실을 가토에게 알렸다. 회령에 가토가 들어왔을 때 왕자 등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가토는 “이 사람들은 바로 너희 국왕의 친아들과 조정 대신들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곤욕을 주는가?”라며 결박을 풀게 했다. 이후 가토는 6진 지역을 모두 접수하고 9월 초에 안변으로 철군했다.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역시 안변으로 끌려갔다.

그때 가토는 돗자리로 싼 가마를 만들어 왕자들을 옮겼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밤이 되면 방문을 새끼로 얽어 묶었으며 수많은 보초병을 세우고 밤새 불을 밝혔다.

한편 7월이 되어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7월 8일의 한산도대첩에 뒤이어 7월 17일에는 명나라 장수 조승훈이 이끄는 3500명의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공격했다. 비록 이 공격은 실패했지만 조만간 명나라 군대 10만이 출병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조선군의 사기는 높아진 반면 왜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가토를 비롯한 대부분의 왜장은 명나라와의 장기전에 대비해 대책을 세우고자 했다. 특히 가토는 조선 땅을 분할함으로써 일단 조선과 화친했다가 장기적으로 명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가토는 임해군과 순화군을 이용하려고 했다. 즉 두 왕자를 돌려보내는 대신 대동강 이남지역 또는 한강 이남지역을 받아내자는 계산이었다.

이 같은 협상안은 무엇보다도 명나라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었다. 만약 대동강과 한강 사이를 절충지대로 하고, 대동강 이북은 조선이 한강 이남은 일본이 점유한다면 명나라가 합의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명은 마지못해 전쟁에 참전했지만 확전을 원치는 않았다. 다만 일본군이 명나라의 영토로 침입할까 우려했다.

그러므로 일본군이 한강 이남에 머물겠다고 하면 명나라는 굳이 반대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설혹 조선이 반대하더라도 명나라가 밀어붙이면 협상은 관철될 수 있었다. 게다가 왕자들까지 풀어주겠다고 하면 협상 타결의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가토는 포로로 잡은 이홍업에게 자신의 협상안을 주어 선조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여기에 더해 왕자들의 편지는 물론 수행 대신들의 편지도 보냈다. 가토의 협상안과 왕자들의 편지가 선조에게 전해진 때는 10월 19일이었다.

당연히 조정 중신들은 가토의 협상안을 결사 반대했다. 선조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선조는 협상안을 가져온 이홍업을 사형시킴으로써 거부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는 한편, 명나라에도 강력한 반대 의지를 알렸다.

조선군과 왜군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1592년 12월 26일에 4만3000여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하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군의 전투 양상은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1593년 1월 8일, 조명 연합군은 평양을 공격해 탈환했다. 이여송은 그 여세를 몰아 개성을 탈환했고 1월 24일에는 서울 근교의 벽제역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왜적을 얕보던 이여송은 벽제역에서 유인술에 말려들어 대패했다. 놀란 이여송은 평양까지 후퇴하고 더 이상 진격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일본과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명나라에서는 임해군과 순화군 석방에 총력을 기울였다. 두 왕자를 송환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왜군과 협상하자고 하면 선조가 결사반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포로로 잡힌 지 1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되다


▎임진왜란 당시 13척의 배로 적선 133척을 격퇴시킨 명량대첩을 기념하는 재현행사의 한 장면. / 사진·중앙포토
1393년 2월 20일, 명나라 사신 풍중영은 안변에서 가토와 만나 강화회담을 가졌다. “명나라 사신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는 가토의 말에 풍중영은 “조선의 왕자들이 포로로 잡혔기에 특별히 강화해 어려움을 풀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가토는 “내가 명나라 사신과 회담하는데 조선 사람들을 참여시킬 수 없습니다”라며 통역을 위해 배석했던 조선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풍중영과 단둘이 하루 종일 회담했는데 그 자리에 참여한 조선 사람이 없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가토는 자신이 이전부터 주장하던 내용 즉 두 왕자를 돌려보내는 대신 대동강 이남지역 또는 한강 이남지역을 내놓으라 요구했을 것이 분명하다.

풍중영과의 회담 후 가토는 통역으로 따라온 최우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은 땅을 할양하고 화친하기를 바라는가?”라고 물었다. 최우는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므로 땅을 할양하고 화친하는 등의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가토는 “국왕이 전하는 서찰은 없는가?”라고 물었고, 최우는 없다고 답했다. 그 후 가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로 보면 가토는 화친의 전제조건으로 영토 할양을 약속받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풍중영은 먼저 왕자들부터 송환하라고 주장했고, 가토는 “이미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에게 보고했기에 마음대로 풀어줄 수 없다”는 말로 거절했다. 이어 선조 역시 영토 할양에 관해 어떤 서한도 보내지 않았음을 확인한 가토는 회담을 결렬시켰다. 그 대신 한양에서 강화회담을 재개키로 했다.

그날 저녁 최우는 가토에게 부탁해 왕자들을 만났다. 최우와 인사를 나누고 잠시 대화하던 왕자들은 한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지금 강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분명 바다를 건너야 할 텐데 너희들이 비용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마련해 올리겠다고 답한 최우는 백금 30냥과 명주 20필을 올렸다.

이런 대화로 보면 당시 임해군과 순화군은 일본으로 끌려갈까 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가토는 자신의 협상 안이 관철되지 않으면 왕자들을 일본으로 잡아가겠다고 크게 소문냈던 듯하다. 물론 임해군과 순화군이 앞장서서 가토의 협상안을 지지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가토에게 끌려 한양으로 왔고 같은 집에 머물렀다. 그때 한양에는 먹을것이 거의 없었다. 일본군은 물론 왕자들 역시 먹을 것이 없어 굶다시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재개됐다. 가토는 이전과 같은 요구를 했고, 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후(戰後) 나라 사정을 더욱 악화시킨 왕의 ‘무책임’


▎19세기 중기에 간행된 일본 <조선정벌기>에 묘사된 이순신 장군. / 사진·중앙포토
강화 회담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명과 일본 사이에는 일종의 묵인이 형성됐다. 즉 일본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해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가고, 그 대가로 명은 일본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묵인이었다. 4월 19일, 일본군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해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갔다. 그때 임해군과 순화군은 부산으로 끌려갔다. 이후 명군은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공식화되지 않았을 뿐 명나라는 일본의 남해안 지역 점유를 묵인했고, 일본은 명나라 군대의 조선 주둔을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영토 할양을 통한 화친이라는 가토의 협상안이 관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묵인의 증표로 임해군과 순화군이 명군에 송환됐다. 그때가 1393년 7월. 포로로 잡힌 지 1년 만이었다.

선조의 입장에서 왕자들의 송환은 마냥 기쁜 일만은 아니었다. 조선을 조선으로 보전하기를 원한다면 선조는 영토 할양을 공인하거나 묵인하는 그 어떤 상황도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해야 마땅했다. 그러자면 영토 할양 묵인의 증표로 송환된 두 왕자를 단호하게 거부하거나 처단해야 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의지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선조는 두 왕자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처단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두 왕자를 수행했던 신료들만 가혹하게 처벌했다. 선조는 자신과 왕자들은 전쟁 책임을 조금도 지지 않을 것임을 공언한 셈이었다. 이런 선조가 명나라 장수들에게 왜군을 몰아내달라 요구했을 때 얼마나 호소력이 있었을까? 국력도 약하고 의지도 약한 왕의 투정 정도로 무시되지는 않았을까?

실제로 명나라는 선조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이나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자칫 왜군의 남해안 지역 점유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지속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조선은 유명무실해질 수도 있었다. 이런 아슬아슬한 상황은 정유재란(1597, 선조 30)에서 조선이 승리함으로써 겨우 해소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중 일본군의 남해안 지역 점유가 몇 년간이나 지속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조선의 국력이 약해서였다. 그것에 더해 선조의 무책임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연의> ‘덕형선후지분(德刑先後之分)’에서는 형벌에 비해 인덕을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상이전형(象以典刑)’이라는 <서경>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상이전형’이란 ‘마치 하늘의 별처럼 이치에 맞게 형벌을 씀’이라는 의미다. ‘상이전형’을 남에게는 엄격하게 요구하고 자신에겐 관대하게 적용한다면 그는 어진 군자가 아니요, 좋은 지도자도 아닐 것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원문보기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0741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URL복사

최신기사

URL 복사
x

PC버전 맨위로 갱신

Copyright ⓒ 글로벌시티앤방송. All rights reserved.